메이 싱클레어 고딕 소설 단편선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문학에 적용한 모더니스트. 침체기에 접어든 유령 이야기에 모더니즘을 가미,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고딕 모더니즘의 개척자. 메이 싱클레어다. 실험적인 모더니즘 소설로 성공을 거둔 선두 주자였지만 현대 독자들에겐 기억과 망각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작가. 상처 입은 과거를 망각을 통해 치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자 했던 싱클레어. ‘에로틱’이라는 솔깃한(?) 특징까지 아우르는 싱클레어의 고딕 단편 4편을 수록한다.
「피해자 The Victim」(1922)
이 작품에서도 죽은 자(과거)가 트라우마 형태로 나타나 산자(현재)를 괴롭히는 방식이 나타난다. 혹자는 앞에서 소개한 「토큰」, 「빌라 데지레」, 「증거의 본질」과 함께 싱클레어의 대표적인 에로틱 고딕 단편으로 꼽기도 한다.
스티븐 애크로이드와 도시 올디쇼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 두 사람은 같은 고용주의 집에서 운전기사와 가정부로 각각 일하고 있다. 연인 사이에 균열이 생기게 된 계기는 스티븐의 폭력적 성향. 올디쇼는 스티븐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이 문제로 고용주인 그레이트헤드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 결과는 도시가 스티븐과 헤어져 떠나는 것. 스티븐은 그레이트헤드의 이간질로 도시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적의를 느낀다. 그레이트헤드를 향한 적의는 살의가 되고, 살의는 곧 철저한 계획범죄로 이어지는데…….
자신의 과거에서 고통 받았던 싱클레어가 과거와의 단절과 치유를 초자연적인 유령 이야기에서 찾았던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작가는 시간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가능한 방식인지를 따질 필요 없는 신비주의와 초자연 현상뿐 아니라 프로이드의 심리학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과거를 치유하려고 한 것 같다.
「증거의 본질」의 로자먼드는 사후 유령의 형태로 남편과 황홀한 섹스를 하고, 「토큰」의 시슬리는 결국엔 죽어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한다. 「피해자」에서 과거(유령)가 고통이나 괴롭힘이 아닌 예외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과거를 대하는 작가의 바람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큰 The Token」(1922)
신혼부부가 있다. 여자는 남자를 많이 사랑한다. 남자도 그러는 것 같은데 애정 표현을 절대 하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다. 불확실은 여자를 괴롭힌다. 이 미묘한 긴장관계에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있다. 책장이 날리지 않게 눌러두는 문진.
남자는 유명 작가로부터 선물 받은 이 문진을 애지중지 아낀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대변하는 토큰(징표)처럼. 반면에 여자는 자기가 이 문진보다도 못한 건 아닐까 의심한다. 알게 모르게 큰 병을 앓고 있던 여자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고 남은 건 죽음으로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 의심, 불확실이다.
「토큰」은 작가 싱클레어의 관심사였던 프로이드의 심리학이 반영된 작품. 프로이드의 방어기제와 중재자를 통해 보여주는 심리학적 특징이 읽힌다.
「빌라 데지레 The Villa Desiree」(1921)
결혼을 앞둔 밀드리드 이브는 약혼자의 빌라에서 섬뜩한 일을 겪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난 셈. 약혼자 에드워드는 나중에 오기로 하고, 먼저 빌라에 도착한 밀드리드. 이 빌라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친구들은 한사코 그곳에 묵지 말라고 말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의 집이자 결혼하고 살게 될 보금자리를 무서워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친구들의 걱정을 웃어넘기는 밀드리드.
밀드리드의 여유가 공포로 바뀌는데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약혼자 에드워드의 전처도 결혼 직후 그 빌라에서 죽었다. 그런데 죽은 여자가 한명 뿐일까? 고풍스러운 빌라 데지레는 연쇄살인의 현장인가? 물론 명확히 그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소설은 끝나지만, 암시는 있다.
결혼하는 족족 아내들을 죽인 푸른 수염의 싱클레어 버전. 물론 이번에도 싱클레어는 프로이드와 융을 잊지 않는다. 여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남자의 성적 욕망(리비도)이라면, 밀드리드가 침실에서 목격한 그 괴물(?)은 아스트랄 투사일지도……
「증거의 본질 The Nature of the Evidence」(1923)
메이 싱클레어는 고딕 소설에 에로틱한 분위기를 주입하는데,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증거의 본질」이다. 싱클레어가 성적 욕망을 풀어가는 과정은 백퍼센트 공감할 순 없을지라도 여러모로 색다르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작품에서도 산자와 죽은 자가 긴장관계를 만든다. 그 원인의 하나는 성적 욕망.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와 사별한 마스턴은 꽤 저명한 변호사이자 저자다. 재혼 생각은 없다던 그는 육감적인 이혼녀 폴린에게 성적으로 끌린다. 둘은 결혼하기로 하는데, 마스턴은 그것이 육체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공언한다. 그런데 마스턴의 죽은 아내 로자먼드는 생전 자신의 침실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섹스를 방관할 생각이 없다. 유령으로 겁을 주거나 방해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로자먼드는 육체가 없는 유령이지만 예상외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선다. 그 결과는 에로틱 성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