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감기처럼 면역성이 없어 누구나 걸리는 것
서문
로댕의 작품 속에<신의 손>이라는 작품이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곱게 깍은 미의 극치이다. 신의 손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광경을 조각한 것이다. 한쌍의 젊은 나체의 남녀가 서로 꼭 포옹한 채 <신의 손>에서 탄생되고 있다.
[로댕 - 신의손]
https://www.google.com/culturalinstitute/asset-viewer/the-hand-of-god/uwF08tA6QvTDnw?hl=ko&projectId=art-project
신의 창조 손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사랑하는 남녀다.
그 한쌍의 남녀는 그 전에 고립해 있었을 때보다 서로 어울린 까닭으로 해서 훨씬 완전한 인간이 되어있다. 로댕은 이 한쌍의 남녀의 자태 속에 정신력에 의해서 고상해진 원시적인 힘과 사랑을 표현하는 동시에 남자는 완전히 남성적으로 여자는 완전히 여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에 의해 완성되는 남녀관계,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① 베일에 가려진 저쪽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너와 나의 두 곳에 깃들인 하나의 정신이다.② 두 사람만이 나눈 비밀의 하모니,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사랑의 성립은 이미 융화된 하나의 길고 깊은 구원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의 창조 손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사랑하는 남녀, 하지만 로댕의 손을 떠난 현실적인 남녀의 사랑은 하얀 대리석으로 곱게 깍은 미의 극치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완성되지도 못한 체 표류하고 있다.
이것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콜레라 시절의 사랑>에서 보여주듯 사랑이 다시 문제가 되어야 하는 데는 너무 많은 사랑이 차라리 사랑의 부재(不在)처럼 사랑에는 나쁜 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영화대본, 문고판 서적, 스포츠신문의 적나라한 주제가 된지 이미 오래이고, 여성잡지는 사랑 덕택에 번창한다. 대중가요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노래한다.
TV에 나오는 의식주에 관한 광고, 그리고 ‘사랑’과 거의 관계가 없는 상품의 선전 광고에도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온통 도배질되어 있다.
프랑스 낭만파 시인 프랑수아 비용은 “끊임없이 사랑이란 단어를 남용해 부엌용어나 매일 사용하는 일상용어로 타락시키고 말았다고 기술하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길거리에 나뒹구는 휴지조각처럼 불쌍하게 된 단어’라고 탄식한다. 애인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애플파이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처럼 ‘사랑’이란 단어를 똑같이 쓰면서도, 그 의미는 천차만별 멋대로 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물리학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학이라고③ 할지라도, 사랑은 근면하고도 보편적인 방법으로 실제적 이론적으로 연구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에로티시즘적 현상 탐구가 오늘날의 유일한 철학, 문학이어야 함은 어제도 오늘도 없는 이 유원한 생명적 질서가 오늘의 혼돈을 행복과 쾌락과 고통의 길로 이끄는 가늠자이기④ 때문입니다.
‘존재와 무’란 명제가⑤ 보여주듯이 우리 시대는 사랑에 관한한 또 한 번 ‘이 없는 것’ ‘모르는 것’ 앞에 서서 이성의 벽과 어두움, 눈멀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다시 성애(性愛)를 이성(理性)으로 취급하는 일이⑥ 중요하며, 사랑에 관련된 많은 문제(성, 결혼,이혼, 재혼, 독신 등)는 고대나 현대 할 것 없이 한 사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러셀이자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우리의 추구이기⑦ 때문이다.
뒤시앵 페브로(Lucien febre)도 기쁨,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에 대한 역사를 밝혀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HLD(Healing Love Diary)시리즈는 연애 또는 결혼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서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는 우리들의 노력에 관한 것들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 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보고서들이다.
우리는 이 HLD 시리즈를 통해 표류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 너무 많은 사랑이 차라리 사랑의 부재(不在)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상황에서 사랑에 관련된 많은 문제(성, 결혼, 이혼, 재혼, 독신 등)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