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리 얄라셩 내똥철학 농담집
여는 말 함께 웃자고 하는 농담들입니다. 저를 스쳐지나가 흩어지려는 것들이었는데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하며 이 작은 책에 모았습니다. 독자들께서 이 농담들을 읽는 동안 낄낄거리며 웃고 아주 가끔은 어쩌면 한 번 쯤은 무릎을 치며 동감하고 그러는 동안 몸에서 엔도르핀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샘솟을 수 있다면 저는 다행입니다. 다 읽은 다음 혹시나 이 책을 태워버려야겠다고 (분서 焚書해야겠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제게 지나친 영광입니다. 똥 치질 섹스 채식주의 담배 끊기 탈모 이런 뜨거운 주제들을 철학적으로 잘 다스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자 그리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 대장부가 되고 싶었을 따름이고 우리는 모두가 정치인이니 악법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선거에서 꼭 투표하자 이런 정도가 여기 농담들의 겉에 흘러가는 의미이긴 합니다. 하지만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실컷 웃은 후 “그 개그가 재미는 있는데 의미가 없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요구이듯 이 책의 농담들의 일차 목표는 오직 웃음만이라는 걸 기억하시고 지나친 기대는 삼가 주십시오. 혹시나 이 책이 철학과 조금 관련이 있다고 여기서 인생의 지혜나 위안 같은 걸 기대하신다면 그건 저자의 뜻을 정확하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물론 독자들께서 오해하셔서 그런 지혜나 위안을 발견하신다면 제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합니다. “웃기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노자(老子)의 가르침도 있으니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태는 아닐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겠다고 나서면 “네 까짓 게 날 가르쳐?”라고 할 독자들이 많겠지만 제가 웃기겠다고 나서면 자세를 느긋하게 뒤로 한 채 “음 그래. 그러면 한번 웃겨봐.”라고 할 (첫 번째 종류의)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서 지금 한가하게 웃고 있을 겨를이 없고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소수의 (두 번째 종류의) 독자들에게도 여기 웃기는 이야기들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종류 독자들 모두에게 웃기는 이야기란 결국 춤을 추고 있는(dancing) 이야기에 다름 아니니 이야기로서 배울 점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상식(감각)과(common sense와) 유머감각은(sense of humor는) 둘 다 똑같이 생겨먹었는데 다만 다른 점은 유머감각이 춤을 추고 있는(dancing) 점이라고 지적했지요. ‘가르치고’ ‘웃기는’ 상하관계를 마땅찮아 할 독자들께는 ‘나눈다’는 아주 아름다운 한국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만나고 가지게 되었던 아주 웃기는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 소박한 욕심은 이렇습니다. 독자들께서 이 책을 일단 한번 집어 들면 스마트폰으로든 종이책으로든 제가 쪽 마다 고르게 심어 놓은 웃음 코드에 이끌려 낄낄거리다 어느 틈에 마지막 쪽까지 다 읽어 가버리는 것. 혹은 훨씬 적은 수의 독자들께서는 제가 또한 고르게 심어 놓은 격분 코드에 이끌려 씩씩거리다 어느 틈에 마지막 쪽까지 다 읽어 가버리는 것.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새 마지막 쪽까지 다 읽어버린 독자들께서 “속았다!”고 느끼고는 “어 이거 뭐지?”라고 잠시 당황해 하시는 것이 저의 욕심입니다. 너무 과한가요? 이 험한 세상 낄낄거리든 씩씩거리든 잠시나마 독자들께서 자신을 잊은(무아 無我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게만 해드린다면 책값은 한 것 아니겠습니까? 300 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건질 말이 세 문장도 안 되는 책들이 수두룩한 세상에 적어도 세 번은 통쾌하게 웃겨드리면 책값은 한 것 아니겠습니까? 삶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밥 한 술을 달게 받기 위해서는 밥값을 해야 하고 책을 내면서는 책값을 해야 한다고 제가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음과 같은 보초문장을 세워둡니다. 이 책에서 제가 경험한 일로 소개한 일화(episode)들이나 액자 이야기들을 모두 제가 직접 경험한 일로 단정 짓지는 말아 주십시오. 작가는 주위의 이야기를 귀담아 잘 듣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기댑니다. 일화들을 제외하고 독자들께 저의 의견 주장 태도로 보이는 것들은 당연히 저의 의견 주장 태도입니다. 저는 그런 제 정신의 자식들에게 완전한 책임을 느낍니다. 자 그럼 21세기 뉴욕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길어 올린 내개똥철학으로 출발! --- 맺는 말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연구실 저 암자 그 수도원에서 독일어나 한문으로 또 붓다의 설법을 최초로 기록한 팔리(Pali)어나 예수의 설법을 최초로 기록한 꼬이네(Koine) 희랍어로 기록된 철학책과 경전을 붙들고 앉아 묵묵히 ‘오삽’(평삽)으로 진리를 퍼내고 있는 철학자들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소개한 얄팍한 철학 몇 가지는 모두 그 철학자들께 배운 것들입니다. 그들이 한국 철학을 지켜가는 진정한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삽’은 건설현장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어 흔적이긴 하지만 제 입에 익어 있습니다. 사각형으로 평평하게 생긴 오삽은 둥그스름한 보통 삽에 비해 한 번에 두 배 세 배 더 퍼 담을 수 있습니다. 입대 전 삽자루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던 제가 보통삽으로 ‘깔짝댄다고’ 고참들에게 욕먹고 있을 때 곁에서 묵묵히 오삽으로 저보다 두 배 세 배 작업을 해 주던 군대 동기 박 군에게 저는 늘 감사했습니다. 그 동안 성인이 된 후 오래도록 밥값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가족 친척과 친구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이들과 내가 사랑했던 이들 제가 그 모든 분들께 지은 죄(罪)가 수미산(須彌山)을 넘고 사해(死海)의 소금으로도 다 녹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만담들이 한국어 공동체에 내는 저의 적은 밥값이나마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게 다 낸 건 아니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