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여울에 띄운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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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에 띄운 주홍글씨

저자
김준기 저
출판사
타임비
출판일
2015-08-21
등록일
2016-03-0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1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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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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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젊은 시절 나의 시 노트는

무주구천동 계곡을 휩쓸며 흘러간 금강의 홍수에 떠내려가

대청호 아니면 서해바다 어디쯤에 가라앉아 갯벌에 묻혔거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쯤

종이 결마저 함께 녹아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 그러하듯이

‘시’라는 정령精靈은 나에게 사춘기와 함께 왔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봄날

어머니를 여읜 소녀와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십리 철길을 걸을 때

가슴에 여울져 온 아련한 아픔은 그리움의 씨가 되었고,

열아홉 살 늦은 겨울 밤,

함박눈이 발목을 덮는 십리 눈길을 걸어

자정이 넘은 하얀 밤 병원 관사 정문 앞에서 헤어지면서

검정 겨울코트 깃에 꽂았던 한 쌍의 물방울 수정브로치를 풀어 건네준

소녀는 영영

가슴 아린 그리움의 뿌리가 되었다.



사범학교 3년 동안

미술실은 나의 아지트였고, 문예반은 별실이었다.

시화전을 준비하는 친구들의 시에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도

나의 시는 일기장에 묻혀 있었고

학교를 졸업한 봄날에는

만경강 어귀 망해사 앞 바다 소당께 바위에 몰래 새긴

또 다른 그리움이었다.



나이 스물에 고향을 떠나면서

시골집 뒷산 양지바른 잔디 언덕과

신시대 양장점‘모나미’에서의 철없던 정이 새삼 그리워지고

선생 발령을 받고 타향으로 떠나면서

입영 전날의 만남처럼

솜리 제과점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소녀와 함께

미술실의 추억도 그리움으로 갈무리해야 했다.



‘날개’와 ‘오감도’를 통해

천재시인 이상을 만난 것은 우레소리처럼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금강의 홍수에 떠내려간 노트에 담긴 그리움일 뿐

술에서 깬 새벽이 아니면

비오는 날 오후에나 찾아드는 접동새였다.



* 접동새 ; 두견새. 사랑하는 연인[임]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 원망, 그리움의 울음.





토함산 석굴암을 비추는 해오름이 아름다운 바닷가

가슴을 두드리는 파도소리가

잠들어버린 나의 시를 일깨워주었고

한 겨울 함월산 깊은 계곡 보덕암까지 따라와

귓가에 맴도는 비바리 해녀의 숨비소리는

산새 발자국 하나도 없는 하얀 눈밭에 주홍 물꽃으로 피어났었다.



뱃사공이

유장한 강줄기 한가운데에서 노를 놓은 듯

40여년의 일상을 놓은 다음에야

여기저기 함부로 버려두었던 글 조각들을 살려내는 열정을 되찾았다.

이런 어쭙잖은 나의 글들을

문단의 옛 친구가 들춰내어 세상 빛 속에 내걸게 해 주었으니

발가벗은 영혼이 사뭇 부끄러울 뿐이다.



「그림 그리는 아이가

도화지를 한 팔로 감싸고

화지 위에 엎드려 색칠을 하는 것은

제 깜냥에

비밀스러움을 즐기는 것이란다.

아름다운 비밀은

누구에게나 마음을 살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한적한 계곡에서 멱 감으며

어느덧 성숙해진 자기 몸매에 취해 있다가

언뜻 나무꾼에게 들킨 산골 소녀처럼 부끄럽고 황홀한 비밀,

이제 비밀은 탄로 나는 것이 아니라

탄로 내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려 한다.

내보이고 싶지 않은 속내를

한 조각 내던지듯 꺼내 보이는 것이

이렇게 용기가 필요함을 새삼 깨달으며

기왕에 탄로 난 비밀을

오래된 정원 한 켠에 서있는

구부러진 소나무 등걸에

삶의 형상으로 조각하듯 새겨 보련다.



<탄로난 비밀(첫 등단소감)>」



이렇게 다짐하면서 시와 함께 산지 10여년,

스스로 쌓은 업보인 위암과 대장암에 맞선 가엾은 목숨은

삶의 오만을 내려놓는 시로 성찰하며

이제 칠순이 되면서

그동안 여울에 토하고 씻어 온 글들을

봄나물 소쿠리에 담아

또 하나 내 삶의 마디를 짓는다.

다음 마디는

비로소 시인의 울림을 담기 위한

얼마쯤일지도 모를 간절하고 새로운 기다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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