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3
조선을 충격에 빠트린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주역, 어우동(於乙宇同).
양반가의 딸이자 종실 가문의 며느리였던 여인이 희대의 탕녀로 낙인찍힌 사연은?
‘경국지색’,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이라 불린 여인, 어우동. 그녀는 지금까지도 희대의 음녀로 손꼽히며 각종 드라마와 영화, 소설 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성종실록>에 어우동의 성 유희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그녀가 일으킨 파장이 꽤나 컸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과연 어우동은 단순히 음탕한 요부였을까?
어우동은 뭇 사내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기녀의 신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명문에서 태어나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님)의 손자인 태강수(泰康守) 이동(李仝)에게 출가해 ‘혜인(惠人)’이라는 품계를 받은, 이른바 귀부인이었다.
어우동이 시집간 지 2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잇지 못하자 시어머니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지아비의 소실을 맞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는 윤리와 강상을 으뜸으로 하는 성리학의 나라로 남성우월사회였다. 여성에게는 오로지 순종만이 강요되었고, 칠거지악이라 하여 이에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었다. 이러한 악법과 제도는 사대부나 종실 여인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어우동은 그런 시대에 살면서 속박의 대상이었고, 종실 거문에 출가했던 탓에 인권이 유린되는 법도에 순응해야만 했었다.
결국 어우동은 남존여비의 사회에 반항심을 갖고 스스로 지엄한 법도에 얽매인 삶을 벗어나는 길을 택하게 된다.
-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조선 사회의 모순을 온몸으로 희롱하다
어우동은 왕손들과의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았고, 고관대작은 물론 중인들, 심지어 미천한 노비까지 유혹하는 등 거리낌 없는 남성 편력을 벌였다. 자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성들을 치마폭에 휘감고 주무르며 그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고, 동침한 사내들의 몸뚱이에 자신의 이름자를 자청으로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어우동의 섹스 스캔들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어우동은 끝내 교형에 처해지고 만다. 그러나 같이 근친상간을 저지른 종친들은 단순 유배형에 그쳤다가 몇 년 뒤 다시 돌아왔고, 어우동과 통정한 인물들 대부분이 사면되거나 실직에 복귀하는 등 남자들에 대한 처벌은 비교적 관대하였다.
어우동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유교적 인습과 제도에 반항하며 치열한 삶을 살다간 여인이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품었지만, 정작 한없이 외로웠던 여인. 그녀를 마냥 부도를 어긴 음란한 여성이라고 매도하고 지탄할 수만 있을까? 그녀가 진정 원했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저자 신봉승은 당시의 관행, 여속, 지리, 법도 등을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현하면서 어우동의 내면에 잠재한 조선조 여인의 회한과 배신, 사랑과 증오를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