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괴테는 대문호이면서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는 1771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고 이듬해 법무 실습을 위해 잠시 베츨라어의 제국 고등법원에 부임하었다. 이때 괴테는 부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여인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다.
이 작품은 첫 발표 때는 거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다 부드러운 표현으로 고친 개정판이 간행되었는데 지금 읽혀지는 것은 바로 이 개정판이다. 줄거리 자체는 흔한 사랑이야기이다. 자연을 동경하는 순수한 청년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16세 소녀 롯테를 알게 되어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는 롯테에 대한 사랑을 단념할 수 없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괴테는 이 흔한 이야기에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생생하게 불어넣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연애심리뿐만 아니라 종교적 자연관과 사회비판의 요소를 함께 지닌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은 1770년 무렵 일어났던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베르테르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서간체로 쓰여진 루소의 『신 엘로이즈(1761)』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넓은 의미에서 유럽 낭만주의가 독일에서 꽃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저자소개
(Johann Wolfgang von Goethe)
독일 최대의 시인이자 세계문학의 거장인 괴테(1749-1832)는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자연연구자,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던 괴테는 1768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며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관심을 두었으며,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 G. 헤르더를 알게 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괴테는 1774년 비련(悲戀)을 겪고나서「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써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독일적 개성해방(個性解放)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괴테는 1775년에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해부학 등 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괴테는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하다.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수업하는 화가로서 l,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에그몬트 Egmont」(1787) 등을 썼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으며 1794년부터 실러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 서사시「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晩年期)를 맞이하였다. 괴테는 그 무렵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세계문학의 제창(提唱)과 그 실천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활동을 펼쳤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파우스트」는 괴테가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 걸작의 하나이다. 괴테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