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낭사
1930년대 반일 감정을 기반으로하는 풍자문학을 주도했던 작가 채만식의 작품세계
한국의 풍자 문학이 문단에 크게 드러나게 된 것은 1930년대 후반기의 카프의 해산과 일제 압력의 가중과 관계된다.
당시 우리 문학은 민족주의 문학이든 프로문학이든 하나의 저항 문학이었고,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참여 문학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고압적 현실 속에서 작가가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문단의 관심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 신념과는 위배되는, 혹은 순수의 길, 혹은 친일 노선의 길 등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무력과 자조를 드러내는 고백적 풍자 문학이 태동되었다.
선용이 곰의고개를 다 내려와 다시 평지로 삼십 리를 와서 조그마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비로소 황산골 경내가 되는 그 ‘닭고개'에 당도하였을 때였다. 고개라고 하지만 이 너머서 저 너머까지 과녁 한 바탕이나 될까, 키 큰 사람이면 이 너머서 저 너머가 보인다고 할 만한 하치아니한 언덕이었다. 이제는 다 왔느니라고 그러면서 무심코 보니 고개 너머로 웬 불빛이 환히 솟아올랐다. 선용은 불이 났으려니는 생각지 못하고 초상마당이나 소대상 마당의 모토 불이거니만 하였다. 그러나 막상 고개 위에 올라서 보니 모토불이 아니라 인가에 불이 붙고 있었다.
고개 밑에 집이 단 두 가구가 있고 그중 한 가구가 이쁘게 생긴 처녀가 있는 백생원(白生員)이라는 선비의 집인데 불은 백진사의 집에서 났었다.
선용은 단순에 불난 집 문앞까지 뛰어내려갔다. 사립문은 잠겼고, 멀리 본동에서는 물론이요 단 한 가구 있는 이웃에서도 미처 몰랐는지 사립문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