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이광수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문학은 17~18세기 유럽의 반(反)봉건적 ·합리주의적 사상을 배경으로 한 문학이다.
한국문학에 있어서의 계몽주의란, 신문학 초창기에 새로운 문학양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양식의 갈등을 지양하고 새로운 문학과 예술, 가치관을 보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광수가 계몽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최초의 글은 《정육론(情育論)》인데, 그는 여기에서 어린이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정서교육을 중시해야 한다는 진보적 교육관을 내세움으로써, 이(理)와 지(知)에 치우친 과거의 인간관과 교육관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어린 벗에게> <무정(無情)>은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을 소설로 작품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라는 것은 동경 M 대학에 다니는 김 완식이었다.
완식은 공부가 늦어서 벌써 스물 다섯 살. 그의 집은 서울에 기차로 통학할 수 있는 한강 상류의 시골이지마는 어두운 농촌이어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는 그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완식은 고향에 돌아가면 유일한 대학생으로 뽐낼 만도 하지마는 그의 가문이 중인인 까닭에 양반의 자식들은 그를 대수롭게 알아주지 아니하였고, 또 중학교를 서울에 다녔으나 기차 통학이라, 서울 사람의 생활에도 익숙치 못하여서 그의 마음이나 행동이 시골뜨기의 태를 면치 못하였다. 지난 이년간 동경 생활에도 시골뜨기인 그는 별로 친구도 없어서 혼자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런 완식인지라 여학생을 접촉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서울 학교에 다닐 때에 다른 남자 학생들만 못지 않게 기차 속에서 같이 통학하는 계집애들을 놀려 먹은 일은 있어도 동경 생활 이년에 그가 접촉한 젊은 여성이라면 하숙 하녀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원피이스에게 말을 붙이고 자리를 권한 것 같은 사건은 완식의 일생에는 특필 대서할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완식은 눈을 감아 조는 모양을 할 필요를 느꼈으나 마음이 설레어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이처럼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본 경험이 없었다. 저 원피이스의 여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가 나타난 것이 완식에게는 대단히 큰 인연인 것만 같고 또 그것은 완식에게 무한히 큰 행복을 가져오는 길한 인연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