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지 않는 연습 오해받지 않을 권리
책 속에서
기질의 차이를 알고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자 전과 똑같은 일상들이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예전엔 남편이 등 가렵다고 긁어달라 하면 그 순간 긴장했다. 한 번에 제대로 못 짚으면 “아니, 아니, 거기 말고. 더 아래, 그 옆에……” 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미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 때문에 나는 쉽게 겁을 먹었고, 나를 겁먹게 하는 남편은 나에게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짜증을 안 내는데 너는 왜 걸핏하면 짜증을 내지? 이것은 네가 나를 우습게 알고 무시한다는 표시니까 나도 너를 무시할 거야’라고 무의식적으로 결의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남편의 기질적 특성과 애착 성향에서 비롯된 태도이지 결코 나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_pp.47~48, ‘‘다름’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첫걸음’ 중에서
우리의 삶은 주관적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경험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다. 실재하는 무엇을 우리가 어떤 의미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같은 경험도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경험의 가치가 달라진다. 이것이 각자의 세계를 다르게 만드는 결과를 낳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소위 ‘성격’이라고 불리는 개인적 특성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같은 부모 밑에서 여러 형제가 자라면 기질과 애착 성향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정서적 경험을 하고 그로 인해 부모에 대한 기억도 다르다.
_p.199, ‘관계에서 생긴 상처는 관계에서 치유하라’ 중에서
그동안 내가 남편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던 건 남편이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보호자의 돌봄을 바라지만 각각의 관계에서는 성별과 기질과 애착 성향과 경험에 따라 다른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푼다. 따라서 상대방이 원하는 배려를 해주려면, 그 사람의 기질과 상처의 특성을 알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_p.235,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박’ 중에서
‘내가 잘하면 좋아해주겠지’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게 좋다. 우리가 자신의 관점에서 ‘내가 잘하고 있다’, ‘잘하려고 애쓴다’고 생각한다 해서 상대방도 반드시 그렇게 봐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애써도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상대방이 애써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하지 못하므로 고마워하거나 보상하지 않을 테니 그때는 그 사람도 우리에게서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하지 마라.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 감정을 분명히 알아주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지지하고 그런 자신을 인정해주면 된다. 그것이 ‘나를 지키면서 관계하는 법’이다.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의 평가는 무시해라.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도록 권위를 줄 필요는 없다.
_p.264, ‘나를 지키면서 관계하는 법’ 중에서
자책은 얼핏 보기에는 반성과 닮아 있지만, 본질적인 해결을 피하려는 방어적 태도다. ‘어째서 나는 이것이 어렵고 안 될까’라는 고민에 생각이 뻗쳐 상대의 아픔에 더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공감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상대를 위로하기보다는 공감해주지 못한 자신의 아픔을 달래는 보호본능이 더 우선한다. 결국 언제나 ‘이기적인 나’로 돌아온다. 마치 자해공갈단의 수법 같다.
우리는 이제 부모를 벗어나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대했던 방식을 답습하여 재연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모에게서 대물림된, 내면에서 당신을 꾸짖는 남의 목소리를 버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당신 자신을 다루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당신의 생각, 감정, 욕구를 지지하고 지켜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행복은 거기서 시작된다.
_pp.297~298, ‘네 잘못이 아니야’ 중에서
나를 흔든 것도 남편이지만 나를 붙잡아준 것도 남편이다. 에고를 깨고 방어기제라는 무기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취약한 상태에 놓인 나를 남편은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려고 애썼다. ‘나를 위해 네
벽을 허물어줘.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어’라는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선 여정이었는데, 그 길이 곧 ‘가짜 나’를 버리고 ‘살아 있는 나’로 태어나게 하는 여행이 되었다. 남편의 상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나의 기질과 상처를 알게 됐다.
_pp.298~299,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 중에서
나는 나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는 대상을 향해 대항할 힘이 없는 나는 상대방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나에게로 돌렸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못난 나를 벌주었다. 그것은 방치였다. 진정 삶을 아끼고 돌보고 도와주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저 주어진 시간을 촘촘히 채우는 것으로 인생을 꾸렸다. 변화무쌍한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주는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 비난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것,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것이 있기를 바랐다. ‘이것은 시시한 거야. 분명 어딘가 더 멋진 것이 있을 거야’라고 자위하면서 마땅찮은 현실이 주는 불충분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마음을 기웃거렸고, 나와 놀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고 비웃었다.
_p.329~330, ‘‘나’도 있고 ‘너’도 있는 세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