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녁이 저물 때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서사적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예니 에르펜베크(Jenny Erpenbeck)는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상’(2001)을 수상한 21세기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서사적 소설가다. 그녀는 자신만의 확고한 역사의식과 특유의 여성적 목소리로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구축하며 “거장급의 맹렬한 서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작품은 완벽한 구성미를 보여주며 주술적일 정도로 언어의 음악성이 강하다. 에르펜베크는 『모든 저녁이 저물 때』에서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들며 독창적인 독일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기이한 고독과 죽음을 그려냈다.에르펜베크의 문체는 감각적이고 감성적이지만 절제되어 있다. 그녀의 문장에는 특유의 숙연한 분위기가 묻어 있는데, 우리는 이 묵직한 울림과 죽음이 맞물릴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특정 인물의 진술이나 다른 형식의 글을 자주 인용해 우리를 더 몰입하게 한다. 『성경』『탈무드』『슈타이어마르크 지진 기록지』등 전혀 관련이 없을 법한 글들을 적절한 곳에 절제된 호흡으로 끼워넣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함은 물론 소설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에르펜베크는 문체뿐만 아니라 구조를 통해서도 소설을 견고하게 다진다. 그녀는 이야기를 다섯 권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각 권 사이에는 막간극이 있어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뮤지컬에서 다음 장면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막간극이 이 책에서는 ‘만약’이라는 전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각 권을 넘길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한 편의 강렬한 서사시를 읽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