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전쟁포로 수은 강항, 간양록(건거록), 원문수록
제1장 적진에서 몰래 바치는 글(賊中封疏)
姜沆(1567~1618)은, 朝鮮王朝 중기의 학자·의병장이다. 정유재란 때,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 오사카, 교토 등에 있으면서, 敵情을 고국으로 밀송하였다.
본관은 진주, 자는 太初, 호 睡隱이다. 전남 靈光에서 태어났으며, 강희맹의 5대손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分戶曹判書 李光庭의 종사관으로, 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南行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 오사카로 끌려갔다가, 1598년 교토 후시미성에 이송되어,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 만난 승려 중 슈쿠(?)는, 승려를 그만두고 유학자가 되었으며, 그가 일본 주자학 선구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 1561~1619)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많은 名儒를 배출시켰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古文을 다룰 줄 알아, 李氏朝鮮의 과거 절차 및 春秋釋奠, 經筵朝著, 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강항은 일본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敵情을 적어, 조선으로 密送하기도 하였다가,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1602년, 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 사임하였고, 1608년 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曲禮全經, 小學, 近思錄, 近思續錄, 近思別錄, 通書, 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고종 19)에 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영광의 龍溪祠 內山書院에 祭享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 城主 아카마쓰(赤松廣通)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雲堤錄, 綱鑑會要, 左氏精華, 看羊錄, 文選纂註, 睡隱集 등이 있다.
看羊錄에서 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양을 돌본다’는 뜻이다. 또한 중국 한나라 무제 때, 匈奴에 使臣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항 자신이 붙인 본래 제목은 巾車錄이었다. 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강항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54년에, 그의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소무에 견주어, 제목을 간양록으로 바꿨다.
강항이 간양록에 수록한 시 중에도, 자신을 소무의 처지에 빗대는 대목이 몇 곳 나온다.
1. 정유재란(1597) 때, 왜군에게 포로가 된 경위
선무랑(宣務郞) 수형조좌랑(守刑曹佐郞) 신(臣) 강항(姜沆)은,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하여, 서(西)로 향해 통곡하면서, 삼가 정륜입극 성덕 홍렬대왕 주상 전하(正倫立極盛德弘烈大王主上殿下)께, 상언(上言)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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