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공-세계사로 읽는 1866년 병인양요
1866년 10월, 프랑스제국의 조선 침공, 병인양요는 자국 출신 선교사의 살해에 분노한 프랑스 해군의 감정적인 무력도발인가, 아니면 식민지 획득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저들의 일방적인 침략 전쟁인가?
서세동점의 19세기,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각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토에 대한 야욕을 달성하고 무역과 통상 부문에서 효율적인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 가장 눈독을 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그들은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 신부들의 죽음을 빌미로 무력을 통해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그때부터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에 따라 조선 대신 베트남 남부 지역인 코친차이나를 1차 표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코친차이나를 강점하면서 남중국과 일본까지 촉수를 뻗은 프랑스는 2차 표적으로 조선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조선 침공은 제2제정기부터 재개된 식민지 개척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그들은 군사 행동에 있어서 ‘조선의 야만적 행위에 제동을 걸어 문명화로 이끌고 교인들이 천주에게 기도할 수 있게 해주며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보호한다.’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한국사에서 조선 말기의 시끄러운 소동 쯤으로 평가절하했던 병인양요는 동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력 확산의 거점으로 삼으려던 프랑스제국과 아편전쟁 이후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의 현실을 거울삼아 완강하게 개방을 거부했던 조선왕국과의 국운을 건 한판 승부였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병자호란 이래 230년 만에 겪은 국제전이었다.
국왕 고종 대신 조선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척화론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이 침공해 오자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조선군은 개전 초기에 강화부 함락으로 상심했지만 프랑스군의 해안 봉쇄라는 소극적인 작전에 기대어 전열을 정비한 뒤 순무 천총 양헌수의 활약에 힘입어 정족산성 전투에서 희심에 일격을 날렸다.
병인양요 발발 10년 후 조선은 역내 국가로는 최초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의 무력 시위에 굴복하여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3개 항구를 열었다. 이는 물론 개화와 다자외교를 통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안보를 꾀하려는 고종의 결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막다른 결과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구미 열강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대에 충분히 예견되었고 실제로 벌어졌던 제국주의의 적자 프랑스와 은둔의 왕국 조선의 거친 스파링, 그 막전막후의 낯선 긴장감 속으로 들어가 보자.